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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관한 간단한 소고
봉파리  2007-03-05 13:26:34, 조회 : 3,210, 추천 : 572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교회론 부분을 읽으면서 현대의 한국 교회 갱신에 필요한 메시지를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너무도 쉽게 다가왔다. 16세기 로마 카톨릭의 기독교 타락으로부터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자 칼빈의 메시지 하나 하나가 분명하게 현대 개혁교회에 적용 되어져야 할 부분이 나타났다. 그 중에 본 글에서는 ‘예배의 연극적 요소를 비판하는’ 칼빈의 주장을 현대적 개혁교회에 적용해 볼 것이다.

1. 『기독교 강요』에서의 연극적 요소를 비판

  칼빈은 중세 로마 카톨릭의 자의적 예배해석 및 불합리하고 전통적인 예배의식 즉 성경에서 지적하는 올바른 예배의 본질에 어긋나 있는 억지스러움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다. 칼빈이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많은 부분에서 진리의 편에서 싸움을 진행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 강요』 최종판의 4권 부분에 교회에 관한 전반적인 부분들을 다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칼빈은 이야기 하기를 “우리는 헛된 즐거움만 잇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예를 우리는 교황주의자가 의식에서 쓰는 연극적인 도구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만이 있을 뿐 유익이나 결실은 하나도 없다.”  칼빈은 그의 글 속에 ‘교황주의자’들을 가르켜서 ‘우상숭배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미사를 드리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이야기 한다. 칼빈이 로마 카톨릭의 예배를 논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른 예배가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의 공중 예배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헛된 즐거움만 있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의식을 한 번 살펴보더라도 ‘헛된 즐거움’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의는 ‘헛된 즐거움’ 이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6) 이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온전한 예배의 목적을 그 자신들의 먹고 마시고 뛰노는 것과 함께 했음이 이들의 부패한 속성인 것이다.
  16세기 칼빈 당시의 로마카톨릭 예배 속에 이러한 ‘헛된 즐거움’이 팽배해 있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헛된 즐거움’을 예배에 있어서 연극적인 요소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예배 개혁적인 내용을 이정석 교수의 글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개혁교회와 예배의 회복"이라는 Article에 나오는 일부이다. 이정석 교수는 칼빈이 그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예배 중에서 성경적인 말씀강설에서 벗어나서 예배에 연극적인 요소를 도입함으로 인하여 타락한 예배형태를 지적한 부분이다.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 중에서 세 번째의 잘못된 형태로 지적하고 있는 연극적 예배형태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연극적 예배다(29).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 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 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 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일 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오늘날의 개신교회 예배는 칼빈의 예배개혁을 통하여 정착된 형태이다.”
(이정석, 2000 개혁신학원 동문회특강)  이정석 교수의 글에 나타난 연극적 요소로 인하여 예배자들이 느끼는 ‘엑스타시’에 대한 지적은 현대적인 날카로운 지적이 돋보인다. 칼빈의 16세기 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직관적인 부분이 많다. 조직적인 체계보다는 성경에서 이끌어 내는 실천적인 적용에 대한 내용들이 그의 『기독교 강요』의 전 부분에 나타나 있다. 성경이 원래 이야기 하는 예배의 본질로 회귀하고자 하는 칼빈의 노력을 현대의 개혁교회는 잘 적용해야 한다. 더불어서 교회의 현장에서 어렵게 중세의 암흑기에서 되찾은 예배의 회복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지켜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예배자들은 예배에서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 보다는 그 스스로의 ‘엑스타시’를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예배의 이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의 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예배에 대한 고백이 있다. "But the acceptable way of worshipping the true God is instituted by himself, and so limited by his own revealed will, that he may not be worshipped according to the imaginations and devices of men, or the suggestions of Satan, under any visible representation or any other way not prescribed in the Holy Scripture."  여기서 아래 부분에 어떤 보여지는 표현을 경계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Representation’은 그냥 표현이 아니라 연출 되어진 표현이다. 분장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박윤선 교수는 이 부분인 “인간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지시를 따라서 어떤 보이는 형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도 안되고, 기타 비성경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안 된다.”  를 해설하면서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 외부적인 의식주의와 외식 행위는 금물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예배는 연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특징 역시 철저한 성경에서 예배의 근본원리와 예배모범들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더불어서 예배 중에서 인간이 고안해낸 특정한 연극적인 요소들을 ‘외부적인 의식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배자의 각자의 소견에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철저하게 성경을 근본원리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현대의 예배형태에서 개혁되어야 할 요소

   이상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에서 언급을 했다시피 현대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 16세기 중세 로마 카톨릭의 어긋나간 예배형태를 답습할 수 있은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 팽창과 부흥을 최우선시 하는 현대 교회 흐름은 예배에 불신자들이 친근하게 참가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그 예배형태에 ‘열린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의식주의’보다 한층 더 위험하게 훼손 되어진 예배가 공공연하기 대다수의 교회의 지지를 받으면서 드려지고 있다. 열린 예배는(= 비록 예전과는 다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한때 열풍이 불다시피 하여 전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열린 예배의 본류는 미국의 Fronier Worship 이었다. 19세기 미국장로교회의 연합과 재분열의 와중에 선 즈음 미국에서는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대각성 운동은 복음주의의 대두라는 점에서 개혁주의와는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감리교나 침례교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프론티어 워십의 형태는 뜨거운 준비찬양을 시작으로 하여 예배자들의 결신과 헌신 그리고 선교에 이르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 서부개척의 시작으로 인하여 지나친 실용주의적 사고가 교회 안에 들어온 결과이다. 또한 개인의 영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개인의 영성을 경건생활과 연결시킨다면 할말은 없지만,여기서 나타나는 폐단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일으킨다는 접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바른 예배의 목적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일차적인 개념은 예배자와 전도 대상자의 감정에 편하도록 조절하는 예배적 요소를 도입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예배의 목적은 훼손된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분위기의 예배형태가 지나친 팽창주의와 부흥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무분별하게 예배 안에서의 연극적인 요소들이 도입이 되었다. 일단은 이 두 가지 면에서 개혁주의 예배의 형태가 지켜져야 한다. 첫째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Sola Scriptura에서 Tota Scripture로 전이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이야기 하듯이 비성경적인 내용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아무리 사람들이 모두다 그것이 옳다 하더라고 성경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과 성경에서 어긋나 있는 비성경적인 것을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개혁해야 한다. 개혁주의는 언제나 바른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하여 언제나 개혁의 깃발을 들고 왔다. 둘째는 바른 예배모범에 따른 예배의 형식을 지켜야 한다. 공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예배모범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의 목적을 잘 살리기 위함이며 질서를 지키기 위함이다. 이 질서를 위하여 두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현대예배 요소들을 살펴보겠다.

1) 준비찬양 : 찬양 역시 예배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언제 부터 인지 한국 교회는 ‘예배 인도자’, ‘찬양 사역자’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하는 전문 사역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공공연하게 예배 요소로써의 찬양의 순서가 ‘준비’라는 형태를 가지면서 예배를 위한 준비요소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배자들을 감정적으로 정돈된 상태로 몰입시키기 위하여 ‘찬양 사역자’들은 과도한 몸짓과 울부짖는 듯한 쉰 소리를 동원하여 예배자들을 흥분시킨다. 찬양 중간 중간에 도입되는 ‘신앙간증’ 역시 그 분위기를 잡아가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찬양을 예배의 부분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준비 찬양’ 이라는 순서는 좀 더 절제 되어지는 형태로 진행되어야 한다.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기도 형태를 생각해 보라.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기도의 응답을 위하여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 가면서 까지 그토록 열정적으로 기도했지만 바알은 끝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적 흥분상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다.

2) 예배 순서 중의 춤이나 특별 찬양 : 종종 예배를 위하여 ‘워십 댄스’ 또는 ‘몸 찬양’ 이라는 순서가 삽입되곤 한다. 예배 도중에 나와서 한들한들 춤을 추면서 바라보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아멘’ 이라는 동의를 구하곤 한다. 칼빈은 이야기했다. 연극적 요소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예배의 타락이 극치를 이루었던 로마 카톨릭에서나 일어나던 일이었다. 칼빈은 이것을 개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개혁교회라 지칭하며 칼빈의 개혁주의 정신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너무도 스스럼 없이 예배도중에 온갖 연극적인 요소들을 삽입하는 교회들이 많다. 예배 도중에 흐르는 요소들은 온전하게 예배자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 드려져야 하는 순서로써 진행되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에서 서두에 언급하였지만 16세기의 예배적 상황과 현대의 예배적 상황의 몇 가지 부분들이 비슷함에 주의를 하여야 할 것이다. 칼빈의 개혁이 시대를 흘러내려오면서 바른 개혁주의적 신학이 그 본의를 잘 살려서 적용되지 못하고 현대적 상황의 이해를 위하여 잘못 재해석되고 있다. 예배는 신자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잘못되어진 부분들이 단기간에 바로 잡히지는 않겠지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면서 서서히 한국의 개혁교회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김형익
아멘.
전도사님, 예배시간중 청중을 흥분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행위는 너무도 만연해서 예배시간에 앉아 있기 조차 민망한 곳이 어디 한두군데 입니까??
하지만 그나마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들어야 되기에 어쩔수 없이 참석하게 되는 상황도 가끔 발생하더군요
2007-03-08
16:35:29



김형익
이곳 싱가폴교회에서 예배중간 헌금시간에 특송을 하는데 특송후에 청중들이 가끔 박수를 쳤습니다. 목사님께서 박수를 치지말고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으로 수정을 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2007-03-08
16:39:27



봉파리
사실, 현대교회에서 만들어내는 예배의 양태들은 갑자기 생겼다기보다는 과거 기독교회 안에서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잠시 없어졌던 것들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보편적인 구원관과 세상의 보편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다원주의적 사고를 상황화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면죄부를 주는 현대교회 예배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되겠지요.

그래도, 우리가 참으로 교회됨을 증거하고, 교회로 모인다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하나님앞에서 예배로 드려지는 우리의 마음을 한번쯤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구원은 배타적일수 밖에 없으니까요. 케케
2007-03-09
13:4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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