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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받는 자
봉파리  2007-03-12 15:58:51, 조회 : 3,579, 추천 : 784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받는 자

Ⅰ. 서론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안으로 초대하시고 그곳에 머무르도록 하시기 위한 외적인 수단 또는 도움으로서의 교회에 관하여 진술하고있는데 사실상 기독교강요의 제일 마지막부분인 이 4권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특별히 칼빈의 하나님 주권 사상은 교회론 에서 선택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외적인 도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강요>제 4권에 수록된 그의 교회론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란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교회일 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교회는 카톨릭처럼 제도적인 성격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뿐 아니라, 루터가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성격도 가진다. 그러나 이 두가지 성격이 나뉘어지기 보다는 합쳐져서 교회를 통해 신앙을 세우는 것이 그의 주 목표였다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시는 은혜 중에서 특히 말씀과 성례전으로 강조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칼빈은 강조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를 두고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나누었다. 그에게서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관계는 중심을 같이 하면서 중첩하는 두개의 동심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칼빈은 " 참된 교회란 참 신자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는 교회"라고 말한다.그리고 교회의 표지인 "말씀"이 올바로 선포된다면 교회의 사명인 사회봉사와 선교등을 통해 사회와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불신자 및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앙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교회를 주셨다는 칼빈의 교회론을 항상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본 글에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개혁주의적 교회론의 입장에서 크게 두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려고 한다. 첫째는 교회의 형성 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후에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이 당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으며 그 결과 교회가 어떤 단계를 거치면서 생겨났는가를 이야기 하겠다. 공동체로써 모이는 교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다. 둘째는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는 교회”에 관하여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사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겠다.
Ⅱ. 본론

교회의 형성
사도행전 1:1-2 의 시작을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 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 하였노라” 박윤선 박사님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사도행전의 시작은 전반부 저자의 글들을 종결로써 기록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종결이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자하나님으로써 당시 사람들에게 실제로 계시 되어진 사건의 종결로서 이해되어진다. 계시의 종결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에게 느껴지던 감정은 기대와 절망, 두 가지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 – 과연,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 에게는 다가올 부활의 소망을 믿으면서 십자가의 사건을 맞이했을 것이며, 부활에 대한 소망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없었던 사람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 에게는 종결이라는 의미는 말 할 수 없는 낙심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복음서의 마지막을 보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 지낸 후에 요한복음 20:2에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을 보라” 이 고백은 당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계시된 사건들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고백이었다. 요한복음 20장 9절에서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은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것이 제자들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 하신후에 “확실한 많은 증거” (행1:3)로써 저희에게 보이시면서 그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 하셨다.”(행1:3)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이루어지고, 그 재림으로 완성되는 나라를 가리킨다. 이는 복음 운동과 그 완성을 말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들은 제자들이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면서 교회로 모이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제 승천과 더불어 제자들과 육체적으로 함께 하시지 않지만 교회의 머리로써 성령하나님과 함께 교회의 사역들을 이루어 나가신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유하는 다락방에 모였다. 이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1:14)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이제 이들에게는 실패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승리자이신 예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서 기도를 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 예수님의 승천의 현장을 목도한 이들의 기도에 무슨 근심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을 주신다. 목도한 사건에 이제 그들에게 하나의 약속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명령이 존재한다.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명령이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행 1:8 전반부에 약속하신 성령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2-4) 임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각기 난 곳 방언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사도들의 말씀증거함을 자신들의 언어로 듣게 되는 일들이 발생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이후로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 큰 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교회는 전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성령의 개인 임재함이었다. 승천하시면서 약속했던 보혜사로서의 성령하나님께서 개인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본인은 여기에서 교회의 형성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에 따른 교회 공동체의 반응과 나타나는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모교파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임재에 따른 방언의 은사는 오순날 임했던 실제 성령의 임재함의 결과와는 상이한 차이가 있다. 오순날 성령 임재에 따른 방언의 은사는 서로간에 대화 할 수 있는 은혜의 기쁨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문과 같은 이상한 말로써 자신의 극한 감정몰입 상태로써의 은사가 아닌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들에 관하여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시면서 임재하시는 사건은 자신의 개인적 욕심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개척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신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기도하는 가운데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함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공동체로써의 교회는 아닌 것이다. 또한 성령 임재후 공동체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성도간의 말씀의 충분한 나눔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나님의 큰 일”을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교회의 처음 형성 과정에서 성도들간의  충분하고 경건한 “말씀”의 나눔과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오직 기도와 열광적인 찬양만을 강조한 나머지 성경의 강해시에는 성도들의 부족한 이해와 성경의 오해가 너무나도 심한 경우가 많다. 사도행전의 공동체에서는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이 일의 증인”으로써 사역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은혜 됨을 느꼈을 것이다.

둘째로는 교회의 목적이다. 성령이 임함을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4000명이 회심을 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계시의 사건들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기록되어진 말씀으로써의 “성경”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일의 증인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증인된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저희들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여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2) 이들은 나눔을 시작했다. 교회 공동체의 시작을 “말씀”으로 나눔으로 시작했다면, 이제 공동체 내에서는 “말씀”의 실천적 형태로써의 “육적양식”의 나눔으로 행함이 일어났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보편적으로 사회 사업가들의 구제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의 구제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교회공동체 에서의 구제의 시작은 도와주는 개념에서의 구제보다는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형태의 “나눔”에서 발전되었다. 이러한 “나눔”은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라는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이렇게 쌓인 “나눔”의 소중한 제물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회와 교회간의 부조로써 그 빛을 발하게 된다. 나눔의 대상 확장은 교회는 우주적인 개념에서의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교회만 유일한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모든 바른 교회들은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모두가 하나의 교회로써 지체인 것이다. 지체의 어려움을 어찌 보고있을 것인가? 차라리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면에서 성숙했다. 자신들에게 조상의 멍에를 지우려 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보기에도 싫었을 것인데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을 나누려는 이들의 반응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성숙이었는가?

또한, 이러한 “제물을 나눔”이 교회의 목적인가? 물론,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쓰라는데 있다. 이것의 출발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도들의 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공동체 내에서의 나눔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교회로써 모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칼빈이 이야기 한 “교회에서의 말씀”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제물의 나눔”으로 인하여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구제의 불균등으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불평이 발생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행 6:1-2)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을 굉장히 빈부의 격차가 큰 생활이었다. 사회적 부의 80%를 10%의 부유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 부유한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를 너희가 죽였도다”라는 주체인 산헤드린 공회원,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이었다. 이러한 부의 불균등한 사회속에서 초대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뿌리 채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성령을 은혜로 받은 초기 교회내에 악이 들어왔다.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 여기의 제자는 사도들을 말함이 아니라 일반 신자를 말함이다.  교회내에 신자들이 많이 짐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이다.

또한 사도행전은 이 사건 이전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행5:1-2) 교회내에서 소유를 팔아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있었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개념을 철저하게 무시한 행동을 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에 있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인 메시지였다. 이들이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깨달았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적인 부패상태 에서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써의 구원인 것이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이러한 것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 두 사건 에서 나는 교회 내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두 가지 객체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자와 말씀을 듣는 자로 구성되어 있다. “말씀” 이라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전하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교회로써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공동체에서의 소유를 팔아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말씀을 전하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행동이 없어서 발생한 문제였다. 사도들이 초기 공동체 내에서 했던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 이외에 여러가지 다양한 일들을 겸해서 했을 것이다. 이러는 중에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 6:4)의 선언을 하게 된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전하는 증인으로써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이들이 받은 증인된 사명은 특별한 것이다. 사도들은 일반 제자로써의 충실한 사람들의 몫까지 감당하려고 했던 것이 결국 공동체 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예수그리스도의 피 로써 세워진 교회를 무너 뜨릴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들의 원래의 사명으로 돌아왔으며 구제 사업을 위하여는 집사들을 세워서 그 들만의 특별한 사역에 전념을 하였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말씀만 잘 전하면 되는가? 그러면 모든 것이 본질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움직이는가? 아니다. 아나나아와 삽비라는 말씀을 듣는 자 로써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사도들의 말씀 증거의 핵심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써 그들은 칭찬을 받으려 했다. 베드로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그들을 권징했다. 비록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개인에게 돌아갔지만, 당시 함께 공동체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의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는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어지는 교회와 말씀을 올바르게 따르고 실행하는 교회 이러한 두가지 모습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써 교회의 본질에 한 걸을 다가서게 될 것이다.

Ⅲ. 결론
사도행전은 성령의 지상사역에 관하여 너무도 현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살아서 역사하는 운동력이 느껴진다. 이러한 현실성 앞에서 우리는 교회에서의 성령의 역할과 우리의 반응은 “말씀”이라는 절대적 사실 앞에 겸비해 있어야 할 것이다. 종결되어진 하나님 실존 계시를 받은 사도들의 증거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님을 만나 사건은 매 주일마다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대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게 된다. 칼빈의 “어리석은 자의 안경으로써의 성경”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가 마땅이 가져야 할 말씀증거로써의 사명과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의 모습들이 어떠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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